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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오르의 뉴 룩에 반대한 Little Below the Knee 클럽

by macrostar 2016.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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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셋은 애초에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여성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최근의 리바이벌에 있어서는 약간 다른 측면이 있다. 이 문제는 좀 복잡한데 예컨대 유행이니까(예를 들어 카다시안) 따라해 본다 / 당당한 게 멋있어 보인다(여기엔 내가 직접 선택했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 구태의연한 남성 중심의 사회적 강요가 반복되는 거다 등등. 이 문제는 아마도 이 셋과 그리고 좀 더 다양한 다른 함의들을 더 가지고 있을거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이 트렌드의 폭은 더 커지며 어느덧 캣워크를 뒤덮고 있다.

 

어쨌든 최근의 재등장 전에 코르셋은 패션 트렌드에서 두 번 정도 유의미한 컴백을 했었다. 한 번은 1947년 전쟁이 끝나고 등장한 디오르의 뉴 룩이었고 또 한 번은 1980년대 말 장 폴 골티에와 비비안 웨스트우드였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당시 "언더웨어 as 아우터웨어"라는 말을 했었다. 이건 돌체 앤 가바나에 가서 럭셔리 패션으로 거의 완성이 된다.
 
오늘 제목인 Little Below the Knee 클럽은 1940년대 뉴 룩과 관련된 이야기다. 세계 대전의 와중에 작업복, 유니폼 같은 전쟁 옷만 입던 여성들에게 디오르는 뉴 룩이라는 이름으로 사뭇 트래디셔널한 패션을 세련되게 만들어 놓은 컬렉션을 선보인다. 과장된 어깨, 잘룩한 허리, 보수적이고 단정한 긴 치마를 강조하는 이 뉴 룩과 함께 다시 등장한 게 바로 코르셋이었다. 그리고 소위 waspies라고 하는 waist cincher를 다시 대중화시킨다.
 

 

뉴 룩의 )( 이렇게 생긴 바디 실루엣은 웨이스트 신치로 완성되었다. 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패션과 구축된 바디 라인이라는 형태로 전쟁 기간 내내 소위 못생긴 옷을 입었지만 대신 자유롭게 해방되었던 여성의 몸은 다시 예전에 입었던 갑갑한 옷으로 돌아가려는 반동의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디오르의 뉴 룩이 선보이자 마자 이 시대 착오적으로 보이는 패션에 대한 시위가 시작되었고, 잡지 파리 마치에 컬렉션이 실리자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Little Below the Knee(기니까 이하 LBK) 클럽이다. LBK는 1947년 8월 텍사스 주의 달라스에서 전직 모델로 주부로 살고 있던 바비 우드워드가 조직했고 이내 멤버는 1300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그리고 미국 곳곳에서 비슷한 성향의 그룹들이 조직된다.

 

 

또한 다른 패션 업계들도 디오르의 뉴 룩을 보며 "이건 할머니가 입던 옷과 똑같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튼 LBK에 동참한 분들은 각자 다양한 삶의 태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이 전혀 새로운 유행 때문에 가지고 있는 옷을 다 버리고 새로 뭔가 사들여야 한다는 경제적인 문제를 걱정한 분들도 있었고, 그냥 다리를 내보이고 싶은데 뉴 룩의 긴 치마가 불만이어서 시위에 동참한 분들도 있었다. 1947년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무척 보수적인 시기였고 이 시위에 참여한 분들은 자신을 위해서인 경우도 있었지만 남자(혹은 남편)를 위해서인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특히 미국인) 여성들은 이 역사적 반동에 놀랐고 비실용적인 긴 치마 길이를 비판했는데 캘리포니아의 루지 혼이라는 분이 긴 치마가 버스에 걸리는 사고를 당하면서 이 비판은 더욱 커졌다. 

 

이런 시위에는 역시 여러가지 이유를 가지고 남성들도 동참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조지아의 "The League of Broke Husbands"같은 클럽이다. 남성들은 치마 길이에 대해 "The shorter the better" 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고, 위 사진에서 보이듯 "Long Hemline No Dateline"같은 표어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49년까지 물자 부족으로 배급 체계 아래에 있었던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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