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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다니엘 리의 버버리 2024 FW

by macrostar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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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리의 버버리 2024 FW가 어제 있었다. 이 패션쇼는 가지고 싶은 건 하나도 없지만 왠지 재미있었다. 이런 거 조금 좋아한다. 영상은 여기(링크)에서 볼 수 있다.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데 버버리는 말하자면 20세기 초반의 아크테릭스 같은 브랜드였다. 방수에 관한 앞서 나가는 기술로 기능복을 석권해 나갈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북극이나 에베레스트를 가는 탐험가들이 버버리의 개버딘을 입었다. 군대에서도, 아무튼 비가 문제인 노동자들도 입었다.

 

물론 군대 - 장교 - 귀족 테크트리는 버버리에게 영국 전통의 이미지를 심어줬고 이후 그런 길을 나아갔다. 워크웨어, 밀리터리와의 연계점도 있고 그 헤리티지의 분위기가 챠브나 훌리건 등 서브컬쳐와의 연계점도 만들어냈지만 전반적으로 그런 건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런 브랜드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일단 코트나 머플러 같은 전통의 인기 아이템의 이미지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종합 패션 브랜드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다들 결국은 코트와 머플러다. 날잡고 한번은 치워버리고 그거 없어도 멋진 브랜드라는 걸 어필해 볼 만도 하지만 그런 위험부담은 또 지지 않는다. 이런 인기 아이템의 굴레는 브랜드를 늙어보이게 만든다. 헤리티지와 새로움의 결합은 말은 좋지만 서로를 갉아먹기 쉽다.

 

물론 영국에는 헤리티지를 표방하는 여러 웰 메이드 브랜드들이 있고 원래 하던 걸 계속 잘 하면서 잘 살고 있다. 버버리도 그래도 될 거다. 하지만 버버리는 피터 스톰이나 처치스 같은 브랜드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하고, 따지고 보면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 트래디셔널과의 연계 고리를 붙들고, 루이 비통이나 구찌 같은 브랜드가 되고자 한다. 이 복잡한 줄기 속에서의 계속된 충돌이 버버리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복잡하게 만든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베일리, 리카르도 티시, 다니엘 리로 이어지는 최근 20여년 간의 변화는 지나치게 변화무쌍한 감이 있다. 즉 선장을 너무 자주 바꾸고 있다.

 

현 상황을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다니엘 리는 티시가 도입했던 산 세리프 풍 로고를 치워버리고 예전의 로고를 가져왔고 대신 로고를 파랗게 칠했다. 헤리티지와 새로움의 조합은 이렇게 도식화된다. 패션의 컬러 이야기를 동아일보 패션 캔버스에서 가볍게 했으니 그것도 참고(링크).

 

 

해로즈 백화점을 파란 조명으로 덮는 프로모션을 했지만 그건 페이크였고 패션쇼에서는 파란색을 일부러 제거한 듯한 느낌이 드는 분위기였다. 이 쇼가 왜 재미있었냐 하면 상당히 선명한 콘셉트가 있고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가버렸다는 데 있다. 은근 뚝심이 있는 분. 거기에 투박한 시니컬함이 있는데 고샤 때 보였던 반항적 이미지와는 다르다. 분명 뭔가 빈정대고 있는 거 같은 느낌이 있는 데 선명하진 않다. 버버리의 원초적 캐릭터인 기능성의 영역을 끌어올렸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 하이엔드 아웃도어 브랜드와 경쟁할 듯한 옷에 아마도 그들은 할 수 없는 혹은 하지 않는 럭셔리의 기운을 불어넣고 버버리의 상징인 체크를 마치 카무플라쥬처럼 보호색으로 덮고 있다. 패션쇼로 이렇게 기세가 드러나는 건 좀 오래간 만에 보는 거 같다.

 

 

요란하고 무거운 옷이 줄줄 나오다가 갑자기 셋업만 달랑 입은(탑에 엄청 파인 니트가 있긴 하다) 룩이 두 번인가 등장하고 우산 든 노란 드레스와 나오미 캠벨의 번쩍이는 드레스 같은 게 등장하는 데 효과적으로 살린 거 같진 않지만 그런 리듬감도 마음에 들었다. 저 셋업의 요란한 스트라이프와 요란한 피크드 라펠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더플에 동키, 에스키모의 파카를 합치고 레인부츠에 왠 스웨이드 가방을 곁들인 룩. 온갖 동계 아이템을 섞어서 비, 눈, 추위 모두에 약점을 하나씩 남긴 룩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저렇게 입고 롤스로이스나 테슬라를 타기에도 버거워보인다. 너무 익숙한 아이템의 합이라 별 생각없이 보다보니 뭔가 이상한 그런 것들. 저 조합은 어떤 상황을 위한 것인가 싶은 모호함.

 

히트 아이템이 나와야 하는 신발이나 가방은 여전히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다른 패션쇼에서는 보기 힘든 우산을 들고 있으니(그것도 접이식을 펴지도 않고 얼기설기 묶어 손에 들고) 그걸로 어떻게 해보려는 건가 싶기도 하고, 개버딘 레인코트에 장우산을 지팡이처럼 쓰는 영국 헤리티지 패션과 적당한 거리감 같은 걸 만들어 내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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