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너무 더워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고 다음 주부터 도서관이 여름 휴가라 암담한 미래 만이 예고되어 있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귀가 후 생산성이 0인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데 과거의 사례를 들춰보자면 처서(8월 23일) 즈음까지 별 희망도 가망도 없다. 어딘가 건조하고 시원한 곳이 있다면 얹혀라도 있고 싶은데 그런 곳도 없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오늘은 가볍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한 번.
패션과 옷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사실 가지고 있는 옷으로 하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이야기도 재미있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훨씬 잘하는 사람들이 많고, 무엇보다 나로서는 라인업의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옷 놓고 떠들기를 하고 싶지만 그건 일단 자리를 마련하는 게 너무 어렵다.
물론 그런 와중에 옷 놓고 떠들기 같은 걸 여기에 몇 번 쓴 적도 있고, 개인화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비중이 좀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옷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방법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스타일링 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옷을 바라보면 좀 더 재밌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또한 정보성 0인 무의미한 이야기만이 가질 수 있는 재미라는 게 분명히 있을 거다.
이 바지(슈가 케인 SC40901, 속칭 901 5년차 버전)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한 적이 있다. 간단한 소개는 여기(링크)를 참조. 사실 그때랑 생긴 게 몇 군데 변하긴 했다. 저 별 페인팅은 실제로 보면 그냥 더러운 때처럼 보일 뿐 잘 안 보인다. 이상하게 사진에는 잘 보이네.
901이 옷장 안에 들어온 지 벌써 한참이 지났고 이 옷이 가지고 있는 상처, 뜯어진 곳 등등에 대해 구석구석까지 거의 알고 있다. 이 옷에 대한 애정이 너무 크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집에 들어와서 옷 벗으면 강아지랑 앉아 당일 입은 옷을 구석구석 보거나 세탁해 놓고 정리하기 전에 또 구석구석 들춰보는 게 일종의 취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옷의 구석구석에 대한 정보는 거의 다 파악하고 있다. 특히 술을 거의 안 마시게 되면서 그런 활동 시간이 늘어났고 가지고 있는 옷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늘어났다. 뭐 가지고 있는 시간을 모두 패션과 옷에만 써도 따라가기가 힘든 게 현실이긴 한데 할 수 있을 만큼은 해봐야지...
아무튼 이렇게 구석구석 볼 때 재밌는 건 역시 바지와 신발이다. 알맞게 복잡하고 제조와 사용상 인과 관계가 볼 만한 정도로 복잡함이 있고 게다가 상당히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발의 경우엔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알아도 수선이 쉬운 일이 아니다.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식의 문제점들이 쌓이고 나면 부상을 수선하는 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대 수선을 하겠다고 쌓여 있는 신발이 몇 개 있는데 그런 날이 과연 올 지 잘 모르겠다. 여튼 그런 점에서 보면 치아와 좀 비슷하다... 문제를 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가만히 두면 일은 감당 못할 정도로 커진다.
바지의 경우엔 좀 쉽다. 바늘과 실만 있다면 약간의 잔재미도 있다. 이 바지의 경우 그런 쪽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해서 그렇찮아도 낡고 병들었는데 트라이얼 앤 에러의 흔적도 꽤나 생겼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쓸 때 사용하는 모델로도 활약하고 있다. 비록 건강해 보이진 않지만 이 바지 덕분에 다른 모든 바지들이, 또한 다른 모든 옷들이 더 지속적인 생명을 얻고 있으니 그렇게 보자면 동상이라도 하나 세워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든다.
엉덩이 뒷 부분인데 실이 뜯어지고 있다. 레플리카를 만들 때 면사만 사용하면 바지와 함께 경년 변화가 생긴다는 장점이 있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이렇게 된다. 사실 시간의 차이 정도지 열심히 해도 이렇게 되긴 한다... 예전에 한참 동안 입다가 몇 년 쟁겨두고 그러면서 이사를 몇 번이나 하고 그랬는데 그러는 동안 이 지경이 된 거 같다. 특히 면사는 자주 세탁해야 더 튼튼하게 버틴다.
여튼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폴리에스테르 실을 숨겨서 봉합해 놓은 바지들도 있다. 위 사진에는 잘 안보이지만 초록색 실을 사용해 어설프게 봉합을 해 두긴 했다. 적어도 그냥 대책없이 벌어지진 않는다.
이건 상처와 메꾼 자국들... 이런 것도 경험치가 쌓이면 실력이 좀 늘긴 하는 거 같다... 예전에 해 놓은 거 보면 다 뜯어내고 다시 하고 싶은 데 그냥 두고 있다.
이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몇 군데 더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14.5온스이긴 한데 페이딩 후처리를 해 놓은 거라 근본이 좀 약한 바지이다. 오래된 청바지 특유의 흐물흐물함을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에 특히 이런 옷 같은 경우 상당히 자주 세탁하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서 열심히 말린다. 바싹 마른 다음 종잇장처럼 구깃구깃한 거 완전 좋아한다.
이건 강아지 발 찬조 출연... 버튼 홀을 가지고 여러가지를 해봤는데 가는 실로 여러 번 한 게 제일 나은 거 같다. 제일 오른쪽은 좀 굵은 실을 써봤는데 너무 두꺼워져서 버튼이 잘 안 들어간다.
이것은 안쪽에 보이는 균열의 흔적. 길게 가로 줄로 ////(라이트 핸드 트윌) 이렇게 되어 있는 데님이 하얗게 뭉개지고 있다.
페이딩 버전이기 때문에 원래 만들어져 있던 페이딩과 입다가 만들어진 페이딩을 구별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901의 경우 조작된 페이딩의 완성도가 그다지 높진 않다. 아무리 레플리카여도 대부분 회사들이 리얼리티가 좀 떨어진다. 오노미치 데님 같은 식 말고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물론 뭐 이런 상처들이 부지불식 간에 생긴 것도 있고 스토리가 담긴 것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옷에 관해 하는 모든 이야기들 중에 특히나 자기만 알고 있으면 되는 이야기고 그게 기쁜 이야기든 슬픈 이야기든 사실 위치만 알고 소환하지도 말고 그냥 잊어버리는 게 최선이다. 옷에 추억 따위가 담겨 있을 정도의 사사로움은 좀 징글징글하다. 옷에 상처가 생겼고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해야 이 옷이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하다.
오노미치 데님 이야기를 언젠가 한 적 있는 거 같은데 왜 여기 없지... 하고 한참 생각했는데 여기가 아니라 책 원고에 했구나. 다음 이야기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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