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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즐거움

패딩의 이해

by macrostar 201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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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다가오니 패딩 이야기가 많아진다. 봄, 가을에는 니트와 스웨트셔츠 이야기를 하고 여름에는 티셔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4계절 내내 바지 이야기를 한다. 일상복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똑같은 걸 입고 꾸준히 관리한다. 가끔 이런 데 올라오는 웃기는 이야기나 패션 잡지 같은 데 실리는 웃기는 옷을 보고 옷에 대한 생각의 폭(=선택의 폭)을 약간 넓힌다. 그리고 다음 옷을 선택할 때 참고한다. 사실 넓히지 않아도 되고 참고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튼 훈련의 덕목이 감각의 고도화 같은 패셔너블의 길과 아예 다르다. 그러므로 따로 익혀 능숙해 져야 한다. 예컨대 스타일이라는 이상적인 길은 한쪽이 고도화되어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양쪽의 능숙한 훈련의 결과에 가깝다. 뭐 어쨌든 이상적인 일이고 그런 일 할 시에 돈 되는 다른 걸 하는 게 낫다. 인간이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그러므로 소중하다.

 

패딩이라고 하면 이불이 옷이 된 케이스다. 하지만 조금 재미있는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말 쯤을 생각해 보면 에디 바우어는 에스키모 이불인가 뭔가에서 힌트를 얻어 퀼트 구스 다운 특허를 냈다. 요새도 볼 수 있는 패딩 점퍼의 원형이고 사실 거기서 바뀔 것도 딱히 없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 디자이너 찰스 제임스는 퀼티드 새틴 이브닝 드레스를 선보였다. 

 

 

한 쪽이 다른 쪽을 봤을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보다는 둘 다 이불을 봤다가 더 간단한 추론이다. 퀼팅 이불은 아무튼 어딘가 있었을 테니까. 재밌는 점은 이 공기를 품은 울퉁불퉁함에 기능성(따뜻함)과 멋짐(이브닝 드레스에 보온성이 필요할까? 물론 아무튼 따뜻하면 좋은 사람도 있긴 하지) 양쪽에서 동시에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 이불로 옷을 만든 이 인류의 진보는 사실 지지부진을 거듭하는데 산속의 목수는 울 자켓을 입었고, 전장의 군인들은 파일 라이너를 입었고 등등. 운명이 조금 바뀐 건 히피들이 산을 타면서 패딩 점퍼가 필요해진 거고 그게 일본에서 헤비 듀티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패션이 된 거다.

 

 

1960년대 말에 나온 노스페이스의 시에라 파카. 지금도 거의 비슷하게 나오는데 물론 재질 같은 게 좀 좋아졌다. 다운도 그때보다 좋은 게 균일하게 들어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걸 일상복을 점령해 들어갔다고 보긴 어렵고 1990년대 초반 눕시의 등장이 가장 큰 사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요새 이 녹색 놉스에 홀릭해 있다. 왠지 가지고 싶은데 눕시를 이미 두 벌이나 가지고 있고 몇 년 째 잘 입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이걸 보면 너무 웃겨서 가지고 싶다... 그저 따뜻한 잔디가 되고 싶은 거다... 문제야.

 

사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이 역사의 사실들은 몇 개 있지도 않고 이 모델들은 모두 지금도 나온다. 위에서 말했듯 변할 게 딱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패딩이 애초에 옷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즉 이건 옷의 보온을 위한 부분이다. 이게 1990년대라는 최근에 본격적으로 일상의 옷이 되었고 세상에는 옷이 잔뜩 있었다. 그러므로 무슨 옷이든 패딩을 붙이면 된다. 그래서 반소매 티셔츠부터 트렌치 코트까지, 온 바지에도 패딩이 붙었다. 즉 이 옷은 역사의 단계에 따라 이해할 옷이 아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미 울퉁불퉁을 패셔너블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이 울퉁불퉁함에는 선호가 명백하게 갈린다. 좋은 사람은 이게 멋지다고 여기고 심지어 점잖다고 여기기도 한다. 싫은 사람은 어쨌든 울퉁불퉁을 아우터로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히든 패딩마저 싫어한다. 몸이 부풀어 보이기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옷이 보통 그러하듯 그냥 마음에 드는 걸 입으면 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란 가벼운 쪽으로는 가도 다시 무거운 쪽으로 돌아가는 건 무척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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