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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발렌티노

by macrostar 201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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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 특히 디자이너 이름이 붙거나 어느 정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의 패션쇼를 볼때 가장 신경쓰는건 그 회사가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상이다. 말하자면 아르마니의 남성상, 샤넬의 여성상. 어쨋든 한 브랜드가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는 설정되어 있기 마련이다.아무리 아이디얼하게 작업을 한다고 해도 패션이라는건 보여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성공한 40대 전문직 종사자 같은 뻔한 타이틀도 있지만(그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런걸 구입할 수 있으랴) 던힐과 랑방이 어느 지점에서 구별되는가 하는 문제는 소비자에게도 생산자에게도 무척 중요한 문제다.

문제가 생기는 건 뚜렷한 이미지를 가지지 못한 채 시즌마다, 옷마다 중구난방으로 헤매는 브랜드들이다. 이 바닥도 경쟁이 무척이나 치열하고(내가 패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 사라진 회사만 대체 몇개냐), 든든한 팬을 필요로 한다.

즉 하이엔드 패션신에서 최전방에 서있으려면 소비자를 쫓아다니면서 니드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고(그런건 패스트 패션쪽이 훨씬 잘한다), 적절한 이미지와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팬들이 쫓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예전에 유명한 디자이너 한 명이(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아침 방송에 나와서 일단 팔리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운운한 적이 있는데 그런 마인드로 최전방에 나서 가지고는 어떤 승산도 없다.

또 하나는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점은 있는데 그걸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화가가 두더지를 그린다고 그렸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걸 토끼라고 하는 경우다. 이건 약간 복잡한 미학적인 문제를 동반한다. 개인적으로는 일단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은 자체의 생명력과 해석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어떤 시인이 자신이 쓴 시에 대한 국어 문제를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이건 국어 교육의 문제라기 보다 시인과 시, 그리고 세상 사이에 놓여있는 괴리가 잠깐 표면화 된 일일 뿐이다.

시인이 의도한 바가 명확했는데 그걸 감상자 대부분이 캐치하지 못했다면 그건 잘못 쓰여진 시인거고, 만약 의도를 넘어 더 큰 해석이 만들어졌다면 우연치 않게 좋은 결과를 나았을 뿐이다. 우연치 않게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시인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숨겨놓은 거대한 그릇을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중요한, 사실은 매우 중요하고 타고나야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어쨌든 이런 인간상이라는 건 브랜드의 아이덴터티 같은 거라 잘 변하지 않지만, 세상을 쫓아가기 위해 대대적인 변화를 거치기도 한다. 샤넬 같은 경우 코코 샤넬 시절에는 좀 더 다이나믹하고 열심히 사는 여성상이었는데 라거펠트 시절로 넘어오면서 좀 더 비실용적이 되었지만 보다 우아해졌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거대 저택에서 뒤뜰 구경하면서 하인들에게 이것 저것 시키는 사람의 이미지는 아니다.

물론 거대 저택에서 뒤뜰 구경하는 귀부인이 가끔 일하는 모습을 취해야 할 때나 입을 수 있는 정도의 가격대라  정작 그 옷의 이미지가 필요한 사람은 입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중저가 브랜드로 확산되고, 그 이미지로부터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모습을 만들 힌트를 얻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샤넬의 가치는 여전히 살아있다.

자, 뭐 이만하고. 내 취향으로는 좀 더 다이나믹한 컴패니언, 혹은 보다 예술적이고 감성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회사의 옷을 좋아한다. 너무 화려한 옷들을 보고 있으면, 그게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거나 해도 사람을 너무 속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런 옷을 입으며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건 아니고 세상엔 또한 그런 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자신의 패션쇼를 대하는 취향이다.그럼에도 나풀나풀거리는 절제된 우아한 매력을 발산하는 옷들 중에 예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들도 있다. 웅가로도 좋고, 까샤렐도 좋다. 매번 시즌마다 얘네들은 분명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까샤렐의 이번 시즌은 그리다 만 잭슨 폴락 같아서 살짝 아쉽다. 그래도 이 컬러풀함은 무척 좋다.

이런 브랜드 중 하나가 발렌티노다. 이 로마발 날라리 아저씨는 참 재밌는 사람이다. 얼굴에 잔뜩 드리워있는 심술에, 여자 무척이나 좋아하는 마인드에, 내 멋대로 살겠으니 아무도 건들지 마라는 의지가 충만하다. 발렌티노의 세계에서 발렌티노의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자는 화려하고 우아한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발렌티노 자신의 배경이다.

대충 이런 느낌.

알려져 있다시피 위의 레드는 흔히 발렌티노 레드라고 불린다. 페라리에서 볼 수 있는 샤이닝한 레드다. 시즌마다 패션쇼 마지막 즈음 드레스가 등장할 때 반드시 나오고 샵에 가도 마네킹 중 하나는 저 색 옷을 입고 있다.

어쨌든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굉장한 세계관을 피력한다.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이 정도로 완성된 세계를 꾸며나가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더구나 발렌티노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 망나니라 보는 사람은 만화 보는 기분으로 즐겁다. 내 친구라면 곤란했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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