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나온 VDR과의 공동작업 옷 소개 및 설명입니다(링크).
기본적으로 다양한 도심 속 상황에서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옷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등산복이나 작업복처럼 때로 생명과 연결될 수 있는 정도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상황을 고려하는 옷은 아니므로 엄격한 기능성이나 용도 분류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다. 당연히 이런 옷으로는 북한산도 올라가면 안된다. 그저 더우면 하나 벗고, 추우면 하나 입으면 되는 식이고 그럴 때 거슬리지 않는 정도다.
옷이 튼튼하면 오래 입을 수 있고, 오래 입으면 주름이 생기고 색이 변해간다. 두터운 코튼은 이런 용도에 적합하다. 더러워지면 세탁기에 돌리면 되고, 찢어지면 꿰매 입으면 된다. 이런 코튼의 무던함이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대비해 단추와 지퍼는 숨겨진 샤프함을 담당한다. 옷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단추의 반짝거림과 지퍼의 금속성이다. 머리가 혼란스럽게 피곤한 날 어딘가에 앉아 멍하니 옷을 바라보다 문득 눈에 걸리는 반짝거리는 단추는, 세상엔 참 예쁜게 많구나 같은 위로를 줄 수도 있을 거 같다.
공동작업의 상징으로 만든 두 줄 혹은 두 기둥 로고는 새옷에 종종 들어 있는 조각천을 모티브로 삼았다. 원래는 미리 세탁을 해보라는 용도지만 그걸 가져다 허술하게 붙여 놓은 이 조각천은 어딘가 뜯어진 곳을 수선할 때 패치로 활용할 수도 있다. 사실 똑같은 티셔츠에 붙어 있는 다른 로고만 가지고도 다른 “패션”이 되는 세상에서 거슬리면 심지어 그냥 뜯어내 버릴 수도 있는 상업 패션의 상징 같은 걸 넣는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붙이는 일이 약간 번거로웠지만 유지를 했다. 이 공동작업이 옷으로 멋을 부린다기 보다는 이런 옷을 입고 열심히 즐겁게 사는 걸로 멋이 나는데 기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헌팅 코트
VDR에서 이미 내놓고 있는 코트 시리즈의 변형이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이어 받았다. 기존의 파일 안감 대신에 가벼운 합성 충전재 안감을 붙였다. 덕분에 조금 가벼워졌고 안에 같은 코튼 종류의 옷을 입고 있어도 입고 벗을 때 마찰로 귀찮게 하지 않는다. 코듀로이로 만든 주머니 플랩이 단조로움 속 약간의 변주다. 거대한 검정색 덩어리가 연상되는 게 좋긴 하지만 겨울철 심야의 밤거리에서는 약간 위험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고휘도 반사띠 같은 걸 넣는 건 +Black이라는 콘셉트와 약간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밝은 색 장갑이나 모자, 가방 등을 함께 활용하는 걸 추천한다. 다이소에 가면 자전거를 탈 때 쓰는 벨크로 안전 테이프를 판매하는 데 이런 것도 꽤 유용하다.
스포츠 재킷
이 옷은 약간 단정한 자리에서 입을 수도 있는 워크 재킷을 염두에 뒀다. 퍼티그 바지와 셋업으로 입을 수 있다. 사실 이 재킷은 혼종 하이브리드로 몰스킨 같은 느낌이지만 몰스킨이 아니고, 블레이저도 아니고 워크 재킷도 아니고, 캐주얼도 아니고 포멀도 아니고 하는 부정의 총합체 같은 결과물이 되었다. 플랩이 달려 있는 대각선 사이드 주머니는 해킹 포켓, 슬랜티드 포켓이라고 부르는 스포츠 재킷의 전통 방식 중 하나인데 이 덕분인지 이름이 스포츠 재킷이 되었다. 주머니 플랩은 안으로 넣어 감출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살짝 푹신한 느낌의 두터운 코튼 겉감에 체크 무늬 코튼 안감도 붙어 있기 때문에 꽤 포근하고 따뜻하다. 등 가운데 벤트와 둥근 사이드로 귀여운 가슴 주머니도 재미있는 포인트다. 그리고 옷 내부에는 예전 헌팅 재킷에서 모티브를 얻은 수납 공간이 있다. 태블릿 같은 걸 잠깐 넣어놓아야 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다. A4 용지를 접지 않고 넣어둘 만한 크기라 회의 자료나 메모지, 전시회 같은 데 갔을 때 나눠주는 팜플렛을 잠깐 넣어두는데도 유용하다. 이 재킷은 무엇보다 단추가 멋지다. 이 단추가 이 옷이 넌지시 품고 있는 침착함과 단정함을 마무리해 준다.
후디 파카
굵은 코튼 원사로 제작한 데님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겉은 블랙이지만 내부는 화이트다. 적당한 오버사이즈로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했다. 같은 사이즈라면 헌팅 재킷은 물론 스포츠 재킷 안에도 입을 수 있다. 겉을 보면 블랙 바탕에 하얀 점이 박혀 있어서 솔트 앤 페퍼 느낌이 난다. 후드 끈이 달려 있는데 끝 부분 팁이 살짝 어두운 오렌지 색이다. 공동작업 +Black의 스포츠 재킷과 퍼티그 팬츠를 셋업으로 차려 입고 안에 이 후디를 입는다면 이 오렌지 색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새삼 실감하게 될 거 같다. 이 옷은 아래 이야기 할 스웨트셔츠와 비교하면 더 재미있다.
스웨트 셔츠
3번 후디와 같은 데님으로 만들었다. 같은 직물에서 출발해 후디와 스웨트셔츠를 만들었지만 세부 사항은 상당히 다르다. 탈색 가공의 방식도 후디는 솔트 워시드, 스웨트셔츠는 스톤 워시드고 손목, 허리 립과의 연결이나 어깨 라인의 봉제 방식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즉각적으로 눈에 띄지는 않는다. 둘을 가져다 놓고 계속 입다가 어느날 문득 이거 왜 다르지?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게 숨겨진 의도다. 시간이 흘러가면 약간 다른 방식으로 낡아갈 거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심지어 말해줘도 잘 모를 이야기를 혼자만 눈치 채는 그 미묘함이 이 두 개의 옷에서 기대하는 즐거움이다.
퍼티그 팬츠
퍼티그 팬츠는 본래 군대에서 나온 작업복이다. 이 옷의 매력은 안에 숨기는 작업을 하기도 번거로워서 그냥 대놓고 앞에 붙여 놓은 사이드 포켓이고 이런 목표를 향한 직진의 정신이 퍼티그 팬츠의 아이덴티티다. 하지만 원래의 퍼티그 팬츠와 핏이 꽤 다른데 초창기 치노처럼 너풀거리는 와이드한 폭을 가지고 있다. 스포츠 재킷과 같은 직물이지만 바지는 다른 면을 사용했다. 앞뒤 주머니 부분만 스포츠 재킷과 같은 면이고 나머지는 다 뒤집어져 있다. 스포츠 재킷과 함께 입으면 직물의 양면이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상관하지 않고 반복되는 게 뫼비우스의 띠 같은 셋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뒷 주머니에는 단추가 달린 플랩이 붙어 있다. 여기 둘과 허리 가운데에는 역시 반짝거리는 살짝 오버사이즈 느낌의 블랙 단추가 붙어 있다. 그리고 Waldes 지퍼의 짙은 블루 탭 테이프가 브라스와 조화를 이루며 예상치 못하게 멋진 컬러를 지니고 있는 것도, 그걸 보통은 혼자만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은 포인트다.
뒷 주머니 내부, 그러니까 바지 안쪽에는 이 공동작업의 로고가 붙어 있다. 쉽게 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로고다. 하지만 뒷 주머니에 손을 넣을 일이 있을 때 묘하게 거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게 다섯 가지 제품입니다. 저야 모두 마음에 들고 그러니까 발매에 이르렀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모두 구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테니 일단 가장 추천하는 옷은 스포츠 재킷입니다. 겉의 심플함에 비해 꽤 복잡한 옷이고 활용도가 높습니다. 찬바람 불 때 슬쩍 걸치는 것만으로 뭐 지나치게 후줄근하지 않다 정도 분위기는 만들어 줍니다. 단추나 안감 등 부자재도 좋습니다.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으로는 은근 따뜻합니다.
또 하나를 추천하자면 후디 파카입니다. 이 후디도 따뜻합니다. 위 스포츠 재킷과 결합도 좋고 이번에 나온 헌팅 코트는 물론이고 후드가 없는 아우터웨어류와 결합하면 상당한 보온성을 만들어 냅니다. 얼기설기 데님 직조도 보는 재미, 만지는 재미가 있고 위에서도 말한 오렌지 색 팁이 추운 겨울 날 어두운 외투를 잔뜩 껴입고 있을 때 아주 살짝 포인트가 되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탈색과 경년변화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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